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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공연/영화일반

하정우가 말하는 ‘추격자’의 일곱 장면

[이동진닷컴] 하정우는 주류의 흐름에 편안히 몸을 내맡겨 항해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통해 얻은 청춘 스타 이미지에서 스스로 벗어나와 스크린에서 끊임 없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던 90년대 초반의 자니 뎁처럼, 그는 배우로서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아는 지혜와 그 욕망을 관철시키는 뚝심을 함께 가졌다.

안방 극장에서 ‘프라하의 연인’(2005년)의 경호원 역으로 각광받은 후, 그가 선택한 작품들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저예산 영화 ‘시간’과 ‘숨’, 충무로에선 모험적인 시도일 수 밖에 없는 뮤지컬 ‘구미호 가족’, 대리부(代理父) 배역을 맡은 ‘두번째 사랑’이었다. 그리고 TV 드라마 ‘히트’에서의 달콤한 배역으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된 후에는, 신인인 나홍진 감독 영화 ‘추격자’의 끔찍한 연쇄살인마 역을 골랐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욕망이 제대로 보상을 받았다. 개봉 4주째. ‘추격자’의 맹렬한 기세가 여전히 꺾이지 않고 있다. 이 영화가 3월8일까지 동원한 관객 수는 벌써 340만명. 이 작품으로 데뷔한 나홍진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 못지 않게 주연을 맡은 두 배우, 김윤석과 하정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다.

전도연과 공연하는 영화 ‘멋진 하루’의 빡빡한 촬영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하정우를 만났다. 그리고 ‘추격자’에서 하정우의 연기가 빛났던 일곱 장면을 중심으로 오랜 시간 구석구석 자세히 이야기를 나눴다. (그 결과, 이 인터뷰 기사에는 영화의 결말 부분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포함되게 됐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추격자’에 관한 궁금증의 상당 부분이 해소됐다. 하지만 연기자 하정우에 대한 호기심은 오히려 훨씬 더 커졌다.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이 배우의 5년 뒤가 너무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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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에서 연쇄살인범 영민 역으로 열연한 하정우. ⓒ 이동진닷컴-이동진

-‘추격자’의 흥행 양상이 실로 대단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첫 기자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본 후 흥행에 성공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개봉되기 전에 내부적으로 180만명 가량 들지 않을까 예측했었어요. 이 영화는 사실 관객 동원에 있어서 몇 가지 약점이 있지 않습니까?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이고 스릴러 장르이니까요. 주연을 맡은 김윤석 선배와 제가 폭 넓은 관객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배우들인 것도 아니었잖아요. 매니어층이 있는 배우에 가깝다고 봐야겠죠. 그래서 180만명 정도 들면 성공일 거라고 봤던 겁니다. 그런데 첫 기자 시사회 때 분위기가 예상보다 더 뜨거웠던 것을 시작으로, 이후 열린 시사회들에서 매우 반응이 좋아서 기대치가 서서히 올라갔죠. 그렇다 해도 지금의 흥행 양상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흥행도 흥행이지만, 나홍진 감독님과 두 주연 배우들에게 쏟아지는 찬사도 대단하던데요?

“사실 세 사람 모두 그런 상황을 즐기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셋 모두 성격적으로 의심이 많은 편이고(웃음), 이 반응이 온전히 우리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듯 해요. 그걸 서로 잘 알고 있기에 술자리에서 셋이 함께 만나면 일부러 서로 칭찬하곤 해요. ‘감독님, 어떻게 그 장면에서 그런 디테일을 생각하실 수 있었어요?’ ‘형, 거기서 그렇게 한 연기 너무 좋았어요’, 뭐 이러면서, 일종의 자화자찬 시간을 갖는 거죠.(웃음)

-이렇게까지 좋은 반응을 얻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영화가 훌륭해서입니다만, 그건 빼고요.(웃음)

“기본적으로 스릴러 장르로서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이 강했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 부분을 들자면, 주-조연 가릴 것 없이 배우들의 연기가 내추럴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캐릭터 안에 인간의 냄새 같은 게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잔인한 장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매력을 느끼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추격자’를 보신 분들이 워낙 많으니, 이제 영화 속 장면들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은 시기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작품 속 하정우씨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장면 일곱개를 뽑아봤습니다.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뒤에 나오는 장면부터 되짚어보면서 질문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네."

<1> 영민의 아지트 액션 장면

-먼저, 영민(하정우)과 중호(김윤석)가 영민의 아지트에서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액션 장면입니다. 영화 속에서 영민과 중호는 세 번 물리적으로 부딪칩니다. 망원동 골목길에서와 경찰서 취조실 안에서는 영민이 일방적으로 얻어맞습니다. 사실 육체적으로 연쇄살인범이 맞서 싸우는 주인공보다 더 약하다는 설정 자체가 ‘추격자’의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죠. 그런데, 마지막 싸움에서는 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이건 물론 장르 영화에서 클라이맥스를 만드는 관습이기도 합니다만, 그 싸움의 구체적인 양상이 자못 흥미롭지요. 영민은 골프채를 휘두르고 중호는 역설적이게도 원래 영민의 범행 무기인 망치를 듭니다. 가격하려다가 미끄러지기도 하고, 기싸움에서 이기려고 과장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싸우는데, 개싸움에 가까운 사실적 액션 디테일들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싸움은 영민의 아지트에서 벌어지는 것이니까, 영민으로선 일종의 홈그라운드 이점이 있는 거죠. 그리고 영민은 중호의 육체적 힘에 대해 그동안 두려움을 느껴왔는데, 막상 맞붙어서 휘둘러보니까 ‘쟤도 나가떨어지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웃음) 그렇게 싸우면서 자신감을 얻어나갔던 거죠. 이 영화에 일정한 모티브를 제공했던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범행 중에도 그런 게 있었더군요. 어느 노부부 집에 부부 외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갔는데, 정신지체인 아들이 2층이 내려왔대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겁이 덜컥 나서 무려 서른 번 넘게 잔인하게 내리쳤다고 합니다. 자기와 육체적 조건이 비슷하거나 더 좋은 남자와 맞부닥쳤을 때 살인자라도 충분히 공포를 느낄 수 있을 거에요. 아지트에서 중호와 함께 실내에 들어섰을 때 영민은 송곳으로 찌르긴 했지만, 처음엔 그 틈을 이용해 도망치려는 생각 정도였을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 빈 틈이 보여서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는 거죠.”

-영화 초반부, 둘이 처음 쫓고 쫓기는 장면에서도 하나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망원동에서 두 사람이 추격전을 벌일 때 달아나던 영민이 커브를 돌다가 쭈욱 미끄러져 넘어진 뒤 벌떡 일어나 다시 도망가는 쇼트가 있죠. 그 모습은 시각적으로도 대단히 두드러져 보이는 훌륭한 디테일이었는데, 어떻게 찍으셨는지요. 매우 위험해 보이던데요.

“사고였어요.(웃음) 원래는 그 추격전의 후반부에서 넘어지는 설정이 하나 있긴 했지만, 그보다 전인 그 부분에서 미끄러져버린 거죠. 추격 장면에서 뛸 때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궁지에 몰려 달아날 땐 말을 내뱉거나 뒤를 돌아볼 새가 없어요. 그저 앞만 보고 전력질주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뛰다보니 코너를 돌다가 맨홀 뚜껑이 있는 걸 보지 못해서 진짜로 심하게 미끄러졌던 거에요. 그리고 전력질주를 강조하는 이야기를 감독님으로부터 하도 많이 듣다 보니, 넘어진 후에도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계속 달렸던 거고요.”

-그 디테일이 우연히 잡은 장면이었다니, 놀라운데요?

“우연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정우씨가 미끄러졌을 때, 지켜보던 감독님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셨을 것 같네요.(웃음)

“완전 축제 분위기였죠.(웃음)

-뭐, 손을 안 대고 코를 푸신 셈이니까요.(웃음)

“제가 뒷걸음질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죠.(웃음)”

<2> 개미 수퍼 살인 장면

-아마도 ‘추격자’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이 되겠죠? 두번째는 개미 수퍼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영민은 선글래스를 끼고 있지요. 영민은 얼굴에 상처가 많이 나 있고, 또 경찰서에서 막 풀려난 상황이니까, 영화 내적으론 충분히 리얼리티가 있는 설정입니다. 하지만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장면에서 배우가 선글래스를 끼고 연기하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이 드는데요. 사실 얼굴 연기에서 정점을 찍는 것은 눈의 표정일 경우가 많으니까요.

“바로 그런 이유로 감독님께서 제게 그 장면을 촬영하기 전에 ‘괜찮겠냐’고 여러 번 물으셨어요. 그런데 전 그런 설정이 너무 좋았거든요. 눈을 가렸을 때 뿜어져나올 수 있는 표정도 있으니까요. 도리어 저는 그렇게 선글래스로 눈을 가리는 게 너무 상투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표정 자체라기보다는 그런 장면에서 범인이 선글래스를 끼고 있는 이미지 자체가 상투적일 수 있잖아요. 그걸 빼면 오히려 선글래스를 끼고 클라이맥스를 연기하는 게 더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방에 들어와서 발로 미진을 툭툭 건드려보던 영민은 미진이 계속 자는 척 하고 있자 “참, 지랄한다”라고 내뱉으며 웃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웃음은 그 전까지 하정우씨가 이 영화에서 웃었던 웃음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전 웃음들이 인간으로서 영민의 복합성을 드러내는 자연스런 웃음들에 가까웠다면, 이 장면에서의 웃음은 연쇄살인범을 그려내는 영화에서 기대되는 소위 ‘악마적 웃음’이라는 점에서 장르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요. 더구나 그 웃음은 극중에서 클로즈업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장면에서 하정우씨가 마음껏 악마적인 웃음을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좀 뻔한 표현이지만, ‘여기선 이렇게 웃어주는 게 맞겠다’ 싶었어요.(웃음)”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서, 연기란 하는 것 못지 않게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 장면에서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까지 그렇게 웃은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바로 그렇습니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이후는 배우로서 한 시름 놓을 수 있는 장면들이었어요. 이제부터는 작위적으로 덧붙이는 연기를 해도 상황에 묻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봤죠. 풀려나기 전까지는 연기에 대해 정말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경찰서에서 취조 받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는데다가 패턴 자체가 너무 뻔하니까요. 연기에 어떻게 콘트라스트를 주면서 다양하게, 지루하지 않게 할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했죠. 어차피 범인이라는 것을 초반에 드러내고 가는 영화니까, 영민이 지능범인지 아니면 아이 같은 사이코패스인지에 대해서 힌트만 살짝 보여줄 뿐 완전히 드러내진 말자는 판단을 했어요. 그런데 분석관 앞에서 폭발하는 장면까지 찍고 났으니, 이제 그 이후는 악역임을 제대로 보여줘도 된다고 믿었던 겁니다.”

-미진이 숨어 있는 수퍼의 내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영민이 단 번에 들어서지 않고 잠시 멈춰서서 안을 쳐다보는 모습도 기억에 신선하게 남아 있습니다.

“멈춰서서 2~3초간 안을 쳐다봤어요. 관객들이 보셨을 때 그 장면이 한 장의 사진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길을 가면서 담배갑을 구겨버릴 때부터 관객들은 영민이 개미 수퍼에 들르겠다는 예감을 하죠. 그때부터 극적 긴장감이 계속 올라가는 셈입니다. 이어 수퍼에 들어서서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조바심이 점점 더 심해지죠. 그곳에서의 장면들은 관객의 긴장감이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는 상황이니까, 제 연기의 패턴을 더더욱 줄여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뭔가를 적극적으로 하는 연기는 경계해야겠다는 거였죠. 오히려 사진 같은 느낌을 주면 임팩트가 더 강해지겠다는 느낌이었어요.”

-‘참, 지랄하네’라는 대사 역시 참 악마적이죠?(웃음)

“영민은 그 상황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봤어요. 들어가서 미진이 자는 척 하고 있는 장면을 보는데, 손만큼은 바르르 떨고 있으니, 정말 끔찍한 광경이지만 사악한 살인마 영민 입장에선 웃겼던 거지요. 그래서 그런 말이 나왔던 걸 겁니다.”

-그 장면에서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망치를 두 번 가볍게 흔들잖습니까. 일반적으로 못질을 할 땐 망치를 몇 차례 흔들어 조준을 하게 되는데, 그 장면은 그런 ‘예행 연습’ 같아서 끔찍하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어요.

“야구 선수들이 타석에 들어설 때도 미리 배트를 두어 차례 휘둘러보죠. 행동엔 그런 사전 제스처가 있잖아요? 그 전에 수퍼 주인으로부터 망치를 건네받을 때도 한 바퀴 돌려보잖아요? 서부 영화에선 카우보이들이 총도 돌리죠.(웃음) 영민은 이전에 석재공이었으니까 더 그랬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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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에서 연쇄살인범 영민 역으로 열연한 하정우. ⓒ 이동진닷컴-이동진

<3> 심문관 취조 장면

-세번째는 심문관의 취조 장면입니다. 이 씬은 중반부 계속 이어지는 취조 장면의 마지막 부분인데요, 비슷한 취조 설정이라도 영민은 여기서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우선 첫 쇼트부터 굳은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등장하죠. 힘없이 낮은 목소리로 설득하려 하기도 하고, 정색하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반말로 내뱉기도 하지만, ‘성불구가 아니냐’면서 계속 자극하는 노련한 심문관에게 말려들어 결국 폭발하고 맙니다. 이 장면은 어떤 느낌으로 연기에 임하셨는지요.

“그 장면에서 가장 컸던 것은 피곤함이었어요. 지금 영화에 들어 있는 부분은 이 장면 촬영을 두 번 실패한 뒤 세번째 날에 찍은 분량이었죠. 처음 찍기로 한 날은 두 배우의 연기 톤이 잘 안 맞아서 접었고, 두번째 날은 제가 심한 몸살에 걸려 연기됐죠. 결국 세번째 날 다시 촬영하게 됐는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너무나 찍기 싫더군요. 뭔가 자꾸 느낌이 이게 아닌 것만 같았고요. 그러던 중 분석관 역을 하신 배우 분과 감독님이 무려 네 시간이나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밖에서 계속 대기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연기에 대한 힌트를 얻었어요. 밤새도록 취조를 받았을 테니 영민도 진짜 피곤하겠다, 바로 이거다, 싶었던 거지요. 그러고나서 그 장면을 제대로 찍을 수 있었어요. 피곤해진 영민의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많이 노출되는 장면이었죠.”

-그 장면에선 분석관이나 영민 모두, 존대말에서 반말로 바뀌는 순간의 임팩트가 아주 강했습니다. “너 같은 새끼가 대개 그러니까”라는 분석관 대사 부분에서는 보면서 찌릿찌릿했어요.

“그 취조 장면은 이미 상황이 많이 진행됐다고 가정하고 시작하잖습니까. 그러니 말씀하신대로 첫 쇼트가 정색한 클로즈업이었던 거고요. 이미 시작부터 영민의 상태는 귀찮고 피곤한 거라고 봤어요. 계속 상대가 약을 올리는데 빨리 끝내고 싶어서 그게 아니라고 힘없이 말하다가 숨기고 싶은 정곡을 찌르니까 폭발하는 거죠.”

-연기하면서 분석관의 말대로 영민이 성불구라고 생각하셨는지요? 사실 영화는 영민이 그 말에 폭발하는 장면을 보여줄 뿐 명확히 설명하진 않는데요.

“네, 성불구라고 생각하고 연기를 했어요. 퀴즈를 풀 때 힌트가 없으면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사실 이 장면을 포함해서 ‘추격자’를 다시 찍으라면 못 할 것 같아요. 정말 이번 작품은 제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그처럼 본능에 맡길 수 있었을까’ 싶거든요. 그랬기에 오늘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제 스스로 뒤늦게 정리되거나 뒤돌아보는 부분도 있어요.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촬영 전 이미 나홍진 감독님과 진이 빠지도록 대화를 나눴기에 가능했다는 거죠. 장면의 그 많은 디테일들에 대해 일일이 이야기를 나눴어요.”

-대화를 위해 두 분께서 엠티도 가셨다면서요?

“양평에 있는 콘도로 단 둘이 1박2일 갔어요.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오후 4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1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대화했죠. 저는 영화를 찍을 때 감독과 배우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촬영을 시작하면, 서로의 진의를 확인하고 서로에 대해 오해를 풀면서 알아가는 그 모든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것들은 촬영 전에 다 마치고 현장에선 서로 교감하며 찍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그 점에서도 이번 영화는 정말 만족스러웠죠. 감독님과 특정 장면에 대해 거론할 때 저는 직접 연기를 선보이면서 대화했어요. 감독님이 ‘영민이 경찰서 밖으로 나오는 장면에선 리액션을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물으면 제가 미리 직접 보여주는 식이었죠.”

-보통 그렇게 남자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면 술이 동반되기 마련인데, 그럴 때 술은 안 드셨다죠?

“두 사람 다 주당이에요. 그렇지만 그런 연기 이야기는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서 두 시간도 합니다. 저도 일단 영화에 대해 대화하면 감자튀김만 먹으면서도 집중적으로 다섯 시간을 할 수 있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 코드가 감독님과 잘 맞았어요. 그랬기에 몸은 힘들었어도, 촬영장은 결코 힘들지 않았습니다. 내내 피곤했지만 그때그때 좋은 에너지를 서로 뿜어내면서 했기에 너무나 흥미로웠어요.”

<4> 지구대 취조 장면

-중호와 함께 지구대에 끌려간 영민이 처음 취조받는 장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인물이 얼마나 유아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장면에서 영민은 마치 어린이가 숙제하는 듯한 자세로 진술서를 쓰고, DNA 검사를 위해 구강 세포를 채취한 뒤엔 손으로 입 안을 만져봅니다. 아이처럼 산만해서 진술하면서도 계속 한 눈을 팔고, 비닐 포장지로 싸여 있는 초콜릿을 비닐째 입에 가져가 당겨 먹습니다. 특히 중호가 호통을 치자 초콜릿을 까먹으려다 손을 입에 댄 채 멈추면서 쳐다보는 표정은 아이의 얼굴 그대로지요. 무엇보다 영민은 악마와 어린아이가 결합된 캐릭터라는 점이 가장 특징적으로 보입니다. 다만 전반부는 좀더 아이 같은 반면, 후반부는 훨씬 더 악마스럽죠. 어떻게 영민을 어린아이 같은 인물로 표현하게 되셨어요?

“연쇄살인범 역을 맡으면 아무래도 기존 캐릭터들이 많이 떠오르잖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전형적일 수 있는 캐릭터니까 배우로선 무엇보다 그 인물이 입체적이길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하다보니 입체적인 살인마가 되려면 먼저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봤어요. 이 인물은 일일이 계산해서 연기하면 안 된다는 판단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이 영화의 영민은 그 결과 탄생한 인물인 셈이죠. 영민은 분명 아이로 소개되어서 악마로 끝나는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초반의 그 취조 장면에서도 연기할 때 일부러 촬영 도중에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에 채널을 다 열어놓았어요. 한쪽에서 타자기 소리가 강하게 들리면 그쪽 쳐다보고, 그러다가 형사가 물으면 대답도 하면서 산만하게. 순간순간 아픈 척 배고픈 척도 하고요.(웃음) 사실 영화를 찍으면서 그런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촬영장에서 왼손 낙서를 계속 했어요. 영화 속 영민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지만요.”

-왼손 낙서라니요?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씨를 쓰면 생각 자체가 단순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이 남으면촬영을 기다리며 콘티 뒷면에다가 왼손으로 낙서를 하는 거에요. 그러면 자연적으로 쓰는 문장도 무척 단순해지죠. ‘오늘은 왜 테이크를 쓸 데 없이 많이 하는 걸까’라거나 ‘몇시에 끝날까’ 같은 내용이 되죠.(웃음) 지영민이란 이름만 수십번 반복해 쓰기도 했고요.”

-캐릭터의 단순함에 몰입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을 쓰신 거군요?

“그렇죠. 헤어 스타일도 그래요. 로버트 드니로는 배역을 맡으면 걸음걸이부터 시작한다고 하는데, 저는 헤어 스타일에서부터 시작하는 편이에요. 영민이란 인물을 떠올릴 때, 헤어 스타일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할 때 머리카락 때문에 걸리적거리지 않게끔 단순화시키자는 생각이 있었죠. 너무 짧거나 너무 길면 시선을 분산시키잖아요. 약간 곱슬머리인데, 그래서 이 영화를 위해 직모로 펴기도 했어요.”

-그럼 걸음걸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드니로 예를 드셨는데요.

“캐릭터를 만들 때 두번째가 바로 걸음걸이에요. 약간 삐딱하게 걷고 싶었습니다. 정면으로 걷긴 하는데 10원 어치 정도는 사선으로 걷는 듯한 느낌이랄까요.(웃음) 시선을 돌릴 때도 눈동자를 돌리고 싶지 않았죠. 뭔가 시선에 변화를 줘야 할 일이 있으면, 고개를 돌려서 봤어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시선이 달라지면 너무 강해 보일 것 같아서요.”

-이런 배역을 맡으면 연기자들이 일부러 고립을 자초하기도 하시는데요.

“이 영화는 저절로 고립이 될 수 밖에 없는 경우였어요. 밤 촬영 장면이 많아서 밤낮이 바뀌니까 혼자 될 수 밖에 없었죠. 새벽 다섯시에야 일이 끝나는데 누구랑 어울리겠어요.(웃음) 극중에서 중호는 그래도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영민은 계속해서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경우죠. 그런 데서 오는 고독감도 있거든요. 그런 게 그 캐릭터에 묻어 있는 거죠.”

-첫 취조 장면에서 영민은 실종된 여자를 팔았냐는 물음에 수줍은 듯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죽였어요”라고 말합니다. 연기자 입장에서 볼 때, 영민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말할 생각이 있었던 건가요, 아니면 하다 보니 불쑥 내뱉은 건가요.

“영민은 앞서 두 번 체포되었다가 그냥 나온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풀려날 줄 알았죠. 그래서 여유만만했던 거고요. 그런데 자기 전화번호를 말한 것은 실수죠. 그래서 강수를 둔 것입니다. 영민은 사실 자신이 무시당하는 걸 참지 못하는 인간이에요. 연쇄살인범들은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많잖아요? 과시욕이 크죠.”

-사실은 거물인데, 여자나 팔아넘기는 잡범 취급을 하니까 자존심이 상한 거군요?(웃음)

“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다, 잡범 정도가 아니다, 우습게 보지 말라는 거죠.(웃음) ‘진짜 죽였어?’라고 경찰이 재차 물을 때 마지막 답변으로 진지하게 시인한 것은 바로 그런 심리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터뷰의 후반부는 3월11일자 ‘이동진의 영화풍경’에 연이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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